1890년 영국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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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0년 영국 최후통첩은 영국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한 외교적 사건이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과정에서 영국과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발생했다. 영국은 마쇼날란드, 마타벨렐란드, 시레이-냐사 지역에서 포르투갈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리스본 주재 영국 공사관 인원을 철수하겠다고 경고했다. 포르투갈은 결국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로 인해 포르투갈 국내에서는 정권이 교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영국-포르투갈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1910년 포르투갈 왕정 붕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양국은 1899년 동맹 관계를 재확인하며 관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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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영국 최후통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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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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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
목표 | 포르투갈이 앙골라와 모잠비크 사이의 영국 주장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게 함 |
원인 | 핑크 맵은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망을 보여줌 |
결과 | 포르투갈은 영국의 요구에 굴복하고 영국은 마숄랄란드를 점령함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영국 |
교전 세력 2 | 포르투갈 |
관련 정보 | |
날짜 | 1890년 1월 11일 |
관련 사건 | 영국-포르투갈 조약 (1891년) |
2. 배경
19세기 말, 아프리카 분할이 본격화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포르투갈은 16세기부터 앙골라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거점을 두고 있었으나, 19세기 들어 내륙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3] 특히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동서로 잇는 광대한 내륙 영토를 확보하려는 야심을 품고, 이를 "장미색 지도"로 구체화하며 프랑스, 독일 등과 외교적 협의를 진행했다.[9] 이를 위해 알레샨드르 드 세르파 핀투와 같은 탐험가들을 파견하여 내륙 지역 탐사와 현지 부족과의 조약 체결을 시도했다.[7][10]
그러나 포르투갈의 이러한 팽창 정책은 이미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던 영국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영국은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같은 탐험가 및 선교사들의 활동[6], 아프리카 호수 회사와 같은 민간 기업의 진출[12], 그리고 세실 로즈가 이끄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북진 정책[13] 등을 통해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특히 잠베지강 유역과 말라위호(당시 냐사호) 주변, 시레이고원 등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지역이었다.[5][6]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담에서 채택된 '실효적 지배' 원칙은 포르투갈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단순히 역사적 권리나 탐험 활동만으로는 영유권을 인정받기 어려워졌고, 해당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력과 통제력을 입증해야 했다.[9] 영국은 이러한 원칙을 내세우며 포르투갈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정당화하려 했다.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1889년 해리 존스턴을 영사로 파견하여 포르투갈의 실질 통치 범위를 조사하고, 포르투갈의 영향력 밖에 있는 지역 통치자들과 조건부 조약을 맺도록 지시했다.[14]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양국 간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특히 시레이 고원을 둘러싼 분쟁은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지며[18] 결국 1890년 영국 최후통첩이라는 외교적 압박으로 이어졌다.
2. 1.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 정책
19세기 초,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실제로 지배하던 영역은 제한적이었다. 앙골라에서는 루안다에서 벵겔라 사이 해안가와 북쪽의 암브리스 정도였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는 모잠비크섬, 남쪽의 마푸투만 일부, 그리고 해안가의 몇몇 무역 거점과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프라주 영지 정도에 불과했다.[3]
포르투갈의 광범위한 영유권 주장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1868년 트란스발 공화국이 인도양으로 나가는 출구로 마푸투만(델라고아만)을 요구하면서 첫 분쟁이 시작되었다. 1869년 포르투갈과 트란스발은 만 전체를 포르투갈 영토로 하는 국경에 합의했지만, 영국이 만 남쪽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 문제는 프랑스 대통령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의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는데, 1875년 중재안은 1869년 합의된 국경을 그대로 인정했다. 두 번째 분쟁은 1883년 독일이 현재의 나미비아 뤼데리츠에 식민지를 세우면서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이곳에 정착촌이 없었음에도 최초 발견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했다.[4]
더 심각한 분쟁은 잠베지 계곡과 말라위호(냐사호) 지역에서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부터 모잠비크 해안을 점령했고, 1853년부터는 잠베지 계곡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벌였다.[5] 한편, 1850년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비롯한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이 냐사호 남쪽과 서쪽 지역을 탐험했고, 1860년대와 1870년대에는 장로회 선교부가 시레이고원을 중심으로 선교 기지를 세웠다. 1878년에는 이들과 연계된 사업가들이 아프리카 호수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노예무역을 근절하고 합법적인 무역을 도입하며 이 지역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876년에는 블랜타이어에 소규모 선교 및 무역 정착지가 세워졌다.[6]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탐험을 지원했다. 알레샨드르 드 세르파 핀투는 1869년 모잠비크에서 잠베지 동부까지, 1876년 앙골라에서 콩고강과 잠베지 상류까지, 그리고 1877년부터 1879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탐험을 이끌었다. 이 탐험들은 모두 앙골라와 모잠비크 사이의 내륙 지역을 연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7] 세르파 핀투의 탐험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1879년 루오강 남쪽과 동쪽 지역(현재 말라위 남동부 국경 지대)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고, 1882년에는 루오강 하류의 시레이강 계곡을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영국 정부에 이러한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라고 요구했지만,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담으로 인해 논의는 중단되었다.[8] 베를린 회담에서는 아프리카 영토 분할의 원칙으로 역사적 발견이나 탐험보다는 해당 지역에 대한 실효적 점유를 요구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9]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세르파 핀투를 1884년 잔지바르 영사로 임명하여, 냐사호 주변 지역과 잠베지강에서 로부마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탐험하고 현지 추장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겼다.[10] 핀투 탐험대는 냐사호와 시레이고원에 도달했지만, 호수 서쪽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11] 반면, 카롱가 인근 냐사호 북서쪽 끝에서는 아프리카 호수 회사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에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었거나 맺었다고 주장했다. 이 회사는 특허 기업이 되어 시레이강을 따라 호수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통제하려 했다.[12]
베를린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식민 제국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86년에는 프랑스 및 독일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특히 독일과의 조약에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연결하는 잠베지강 유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 체결 후, 포르투갈 외무장관은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른바 "장미색 지도"(Mapa Cor-de-Rosa)를 발표했다.[9]
하지만 포르투갈의 이러한 야심 찬 계획은 영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잠베지강 북쪽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은 아프리카 호수 회사와 영국 선교사들이 반대했고, 남쪽 지역에 대한 주장은 1888년 설립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회장인 세실 로즈가 특히 강하게 반대했다.[13] 1888년 말, 영국 외무부는 시레이고원의 소규모 영국인 정착촌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를 거부했지만, 동시에 포르투갈의 영향력 확대 역시 용인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 정부는 1889년 해리 존스턴을 모잠비크 및 내륙 지역 영사로 임명했다. 존스턴에게는 잠베지강과 시레이 계곡에서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통치 범위를 파악하고, 아직 포르투갈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지역 통치자들과 조건부 조약을 맺도록 지시했다. 이 조건부 조약은 영국 보호령을 즉시 설정하지는 않지만, 해당 지역이 다른 유럽 국가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효과를 가졌다.[14]
2. 2. 영국의 반발과 베를린 회담
포르투갈은 알레샨드르 드 세르파 핀투가 이끈 세 차례의 탐험(1869년, 1876년, 1877~1879년)을 통해 앙골라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사이 내륙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자 했다.[7] 이러한 탐험을 근거로 1879년 포르투갈 정부는 루오강 남쪽과 동쪽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고, 1882년에는 루오강 하류의 시레이강 계곡을 점령했다.[8] 포르투갈은 영국 정부에 이러한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담 (1884년)은 상황을 바꾸었다. 이 회담에서는 아프리카 분할에 관한 중요한 원칙이 결정되었는데, 특히 '실효적 지배' 원칙이 강조되었다. 이는 단순히 지역을 발견하거나 탐험했다는 역사적 주장만으로는 영유권을 인정받을 수 없으며, 해당 지역을 실제로 점령하고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원칙은 포르투갈의 주장에 큰 타격을 주었다.[9]
베를린 회담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1884년 세르파 핀투를 잔지바르 영사로 임명하여 말라위호와 잠베지강 사이 지역을 탐험하고 지역 추장들의 충성을 확보하도록 했다.[10] 핀투 탐험대는 말라위호와 시레이고원에 도달했지만, 호수 서쪽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11] 반면, 카롱가 인근 말라위호 서북쪽에서는 영국과 연계된 아프리카 호수 회사가 1884년에서 1886년 사이에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었거나 맺었다고 주장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시레이강을 따라 호수까지 이어지는 항로를 통제하려 했다.[12]
베를린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영토를 확보하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1886년에는 프랑스 및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여 잠베지강을 따라 앙골라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를 잇는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이를 바탕으로 포르투갈 외무장관은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를 표시한 이른바 "장미색 지도"를 준비했다.[9]
하지만 이러한 포르투갈의 야심은 영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잠베지강 북쪽 지역에서는 아프리카 호수 회사와 영국 선교사들이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에 반대했다. 특히 잠베지강 남쪽 지역에서는 1888년 설립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회장인 세실 로즈가 포르투갈의 확장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했다.[13] 세실 로즈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강력히 추진하던 인물이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시레이고원의 소규모 영국인 정착촌에 대한 보호 요청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14] 그러나 포르투갈의 영향력 확대를 용인하지 않았고, 결국 1889년 해리 존스턴을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및 내륙 지역 영사로 임명했다. 존스턴에게는 잠베지강과 시레이강 계곡에서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통치 범위를 파악하고, 포르투갈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지역 통치자들과 조건부 조약을 맺도록 지시했다. 이 조약은 해당 지역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지는 않지만, 다른 유럽 국가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14] 이는 포르투갈의 '장미색 지도' 계획에 대한 영국의 본격적인 견제 움직임이었다.
2. 3. 시레이 고원 분쟁
잠베지 계곡과 냐사호 지역에서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더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부터 모잠비크 해안을 점령했으며, 1853년부터는 잠베지 계곡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벌였다.[5]1850년대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잉글랜드 국교회 소속 신부들이 냐사호(현 말라위호) 남쪽과 서쪽 지역을 탐험했다. 이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걸쳐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부가 시레이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여러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1878년에는 이들 선교부와 연계된 사업가들이 모여 아프리카 호수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노예 무역 대신 합법적인 상업 활동을 통해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고 유럽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선교 활동과 긴밀히 협력했다. 1876년에는 블랜타이어에 소규모 선교 및 무역 정착지가 세워졌다.[6]
포르투갈은 알레샨드르 드 세르파 핀투가 이끈 세 차례의 탐험(1869년 모잠비크-잠베지 동부, 1876년 앙골라-콩고 및 잠베지 상류, 1877-1879년 아프리카 횡단)을 근거로 앙골라와 모잠비크 사이 내륙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7] 1879년 포르투갈 정부는 루오강 남쪽과 동쪽 지역(현재 말라위 동남부 국경 지대)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1882년에는 루오강 하류의 시레이강 계곡을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영국 정부에 이러한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라고 요구했으나, 1884-1885년 베를린 회담이 열리면서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8] 베를린 회담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발견이나 탐험이 아닌, 해당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점유를 영유권 인정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9]
포르투갈은 영유권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884년 세르파 핀투를 잔지바르 영사로 임명하여 냐사호 주변 지역과 로부마강까지 탐험하고 현지 추장들과의 조약을 통해 충성을 확보하도록 했다.[10] 핀투 탐험대는 냐사호와 시레이고원에 도달했지만, 호수 서쪽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11] 반면, 카롱가 인근 냐사호 서북쪽에서는 아프리카 호수 회사가 1884년부터 1886년 사이에 이미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체결했거나, 체결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호수 회사는 특허 기업이 되어 시레이강을 따라 호수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통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12]
베를린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횡단 영토 확보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1886년 프랑스 및 독일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특히 독일과의 조약에서는 잠베지강을 따라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잇는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포르투갈 외무장관은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표시한 "장미색 지도"를 준비했다.[9] 그러나 잠베지강 북쪽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주장은 아프리카 호수 회사와 영국 선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잠베지강 남쪽 지역은 1888년 설립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회장 세실 로즈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13]
1888년 말까지 영국 외무부는 시레이고원의 소규모 영국인 정착촌에 대한 공식적인 보호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영향력 확대 또한 용인하지 않았기에, 1889년 헨리 해밀턴 존스턴을 모잠비크 및 내륙 지역 영사로 임명했다. 존스턴은 잠베지강과 시레이 계곡에서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통치 범위를 파악하고, 포르투갈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지역 통치자들과 조건부 조약을 맺는 임무를 받았다. 이 조약은 영국의 직접적인 보호령을 설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당 지역이 다른 유럽 국가의 보호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효과를 가졌다.[14]
1888년, 포르투갈 정부는 모잠비크 주재 영사에게 냐사호 동남쪽과 시레이고원에 거주하는 야오족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전 켈리마느 총독 안토니우 카르도주가 이끄는 탐험대가 1888년 11월 냐사호 방면으로 출발했고, 당시 모잠비크 총독이었던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두 번째 탐험대는 시레이고원으로 향했다. 이 두 탐험대는 현재의 말라위 지역에 해당하는 곳의 추장 20여 명과 조약을 체결했다.[15] 1889년 8월, 세르파 핀투는 루오강 동쪽에서 존스턴과 만났고, 존스턴은 핀투에게 강을 건너 시레이고원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16]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세르파 핀투였지만, 결국 1889년 9월 루오강을 건너 현재 말라위의 치로모 지역으로 진입했다.[17]
세르파 핀투의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결국 충돌로 이어졌다. 1889년 11월 8일, 시레이강 인근에서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과 현지 마콜로로 주민들 사이에 무력 분쟁이 발생했다.[18] 이 작은 충돌 이후, 존스턴의 부관이었던 존 뷰캐넌은 포르투갈이 영국의 이익을 무시했다며 비난했고, 기존의 지침과는 다르게 1889년 12월 시레이고원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19] 곧이어 존스턴 자신도 (이전 지침과 상반되게) 냐사호 서부 지역을 추가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으며, 영국 외무부는 나중에 이 두 보호령 선포를 모두 승인했다.[20]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영국과 포르투갈 간의 외교적 위기를 심화시켰고, 영국이 중재 제안을 거부하면서 결국 1890년 영국 최후통첩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21]
3. 최후통첩
1888년 포르투갈 정부는 모잠비크 영사에게 냐사호 동남쪽과 시레이고원에 거주하는 야오족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맺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전 켈리마느 총독 안토니우 카르도주가 이끄는 탐험대와 당시 모잠비크 총독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탐험대가 각각 냐사호와 시레이고원으로 출발하여 현 말라위 지역의 추장 20여 명과 조약을 체결했다.[15] 1889년 8월, 세르파 핀투는 영국 영사 해리 존스턴을 만났고, 존스턴은 핀투에게 루오강을 건너 시레이고원으로 가지 말라고 충고했으나[16], 핀투는 1889년 9월 강을 건너 현 말라위의 치로모로 향했다.[17]
이러한 포르투갈의 움직임은 1889년 11월 8일, 시레이강 인근에서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과 마콜로로 사이에 무력 분쟁을 야기했다.[18] 작은 충돌 이후 존스턴의 부관인 존 뷰캐넌은 포르투갈이 영국의 이익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며, 1889년 12월 시레이고원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19] 곧이어 존스턴 역시 냐사호 서부 지역을 추가로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영국 외무부는 이 두 보호령 선포를 승인했다.[20]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영국과 포르투갈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영국은 중재를 거부했으며, 결국 이는 영국-포르투갈 위기로 이어졌다.[21] 1890년 1월 11일, 솔즈베리 경은 포르투갈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각서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마쇼날란드와 마타벨렐란드(현 짐바브웨) 및 시레이-냐사 지역(현 말라위)에서 포르투갈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영국이 수 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영토라고 주장되어 온 지역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함을 의미했다.[22]
3. 1. 최후통첩의 내용
1890년 1월 11일, 솔즈베리 경은 포르투갈 정부에 각서를 보냈다. 이 각서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아프리카 지역, 구체적으로 마쇼날란드와 마타벨렐란드(현재의 짐바브웨) 및 시레이-냐사 지역(현재의 말라위)에서 포르투갈 군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영국이 수 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영토라고 여겨졌던 지역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22]최후통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여왕 폐하의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시레이, 혹은 마콜로, 혹은 마쇼나 지역에 있는 모든 포르투갈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취지의 전보를 모잠비크 총독에게 즉시 보내야 한다. 여왕 폐하의 정부는 본 행동이 없을 시 포르투갈 정부가 제공한 보증은 허상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피터 씨는 오늘 저녁까지 앞서 말한 주장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공사관 인원 전원을 데리고 리스본에서 즉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여왕 폐하의 선박 인챈트리스호가 현재 비고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다.[23]
최후통첩문에 언급된 "피터 씨"는 당시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였다.[23]
3. 2. 포르투갈의 굴복
최후통첩은 분쟁 지역 내 포르투갈의 활동 중단을 요구했지만, 영국 측의 점령 시도에 대해서는 비슷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로즈는 마쇼날란드와 마니찰란드, 현 잠비아 동부 지역에서 활동했고, 존 뷰캐넌은 시레이 고원에서 영국의 점령지를 넓히려 했다. 1890년과 1891년에는 이미 마니찰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군과 로즈의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890년 비준되지 않은 조약에서 포르투갈에 할당되었던 일부 지역은 1891년 조약을 통해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로 넘어갔고, 대신 포르투갈은 잠베지 계곡에 대한 더 많은 영토를 보상으로 받으면서 교전은 중단되었다.[24]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의 요구를 비교적 쉽게 수용한 것은 포르투갈 군주정에 반대하던 공화파를 포함해 국내 많은 이들에게 국가적인 굴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최후통첩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조제 루시아누 드 카스트루 총리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고, 안토니우 드 세르파 피멘텔이 이끄는 신내각이 들어섰다. 이 사건은 이후 포르투갈 왕실 비용 문제, 리스본 암살 사건, 정치적 불안정, 종교적 및 사회적 견해 변화 등 여러 요인과 맞물려 결국 포르투갈 왕정을 무너뜨린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이어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5]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던 솔즈베리 경의 영국 정부가 전쟁 가능성까지 감수하며 강경책을 사용한 이유로는, 포르투갈이 마니찰란드와 시레이 고원을 점령하여 영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26]
1890년 8월 20일, 포르투갈과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의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영토 한계를 정의하는 런던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8월 30일 포르투갈 관보 《디아리우 두 고베르누》에 게재되고 같은 날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또 다른 시위와 내각 붕괴를 초래했다. 결국 이 조약은 포르투갈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으며, 세실 로즈 역시 조약에 반대했다. 이후 새로운 협상을 통해 포르투갈은 1890년 조약보다 잠베지 계곡에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대신, 현재 짐바브웨의 마니칼랜드주를 영국의 영향권으로 넘겨주는 내용의 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891년 6월 11일 리스본에서 체결되었으며, 식민지 경계 정의 외에도 잠베지강과 시레이강에서의 항해 자유를 보장하고 영국이 잠베지강 어귀에 있는 신드 항구의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7]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은 한동안 영국-포르투갈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 포르투갈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자 포르투갈 정부는 영국에 차관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때마침 보어 전쟁이 발발하면서 영국 역시 포르투갈의 협조가 필요해졌고, 양국은 1899년 10월 14일 영국-포르투갈 선언을 발표했다. 이 새로운 조약은 양국의 기존 동맹 관계를 재확인하고, 영국이 포르투갈 식민지를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로렌수 마르케스(현 마푸투)를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향하는 무기 공급을 중단하고 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28]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은 포르투갈 내부 정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은 포르투에서 일어난 실패한 공화주의자들의 반란인 1891년 1월 31일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이때부터 고조된 반왕정 감정은 1908년 2월 1일 카를루스 국왕이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이어졌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통해 포르투갈의 군주제가 종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여파
1890년 영국 최후통첩은 포르투갈에 큰 충격을 안겼으며,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의 요구를 쉽게 수용한 듯한 모습은 많은 포르투갈인, 특히 군주정에 비판적이던 공화파에게 국가적인 굴욕으로 받아들여졌다.[25] 이 사건은 포르투갈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조제 루시아누 드 카스트루 총리 내각의 붕괴로 이어지기도 했다.[25]
최후통첩 이후에도 영국은 분쟁 지역이었던 마쇼날란드, 마니찰란드 등에서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으며, 이는 포르투갈과의 추가적인 긴장과 무력 충돌을 야기했다.[24] 이러한 갈등 속에서 양국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1890년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포르투갈 내부의 반발로 비준되지 못하는 등[27]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1891년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어 포르투갈은 잠베지 계곡에서 일부 영토를 추가로 확보하는 대신, 마니칼랜드주와 같은 지역을 영국의 영향권으로 넘겨주게 되었다.[24][27]
이 최후통첩 사건은 단기적으로 영국-포르투갈 관계를 악화시켰으나, 1890년대 후반 포르투갈의 경제 위기와 보어 전쟁 발발이라는 상황 변화 속에서 양국은 1899년 영국-포르투갈 선언을 통해 다시 동맹 관계를 확인하기도 했다.[28] 하지만 포르투갈 내부적으로 최후통첩이 남긴 상처는 깊었으며, 고조된 반왕정 감정은 1891년 1월 31일 봉기와 같은 사건을 거쳐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이어져 포르투갈 군주제가 종식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5][28]
4. 1. 포르투갈 내 정치적 혼란
영국 최후통첩은 포르투갈 내에서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영국이 분쟁 지역 내 포르투갈의 활동 중단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점령 시도에는 비슷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24], 그리고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의 요구를 비교적 쉽게 수용한 것처럼 보인 점은 많은 포르투갈인, 특히 군주정에 반대하던 공화파에게 국가적인 굴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국민적 분노가 확산되었고, 결국 조제 루시아누 드 카스트루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붕괴하고 안토니우 드 세르파 피멘텔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초래되었다.[25]1890년 8월, 양국 정부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의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공표했으나,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포르투갈 내에서는 또다시 거센 시위가 일어났고 내각이 다시 붕괴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결국 이 조약은 포르투갈 의회의 비준을 통과하지 못했다.[27] 이후 새로운 협상을 거쳐 1891년 6월 11일 리스본에서 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잠베지 계곡에서 이전 조약안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현 짐바브웨의 마니칼랜드주 지역은 영국의 영향권으로 넘겨주어야 했다. 또한, 이 조약은 잠베지강과 시레이강에서의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하고, 영국이 신드 항구의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7]
최후통첩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마찰을 넘어 포르투갈 내부 정치 지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891년 포르투에서 발생했던 공화주의자들의 봉기(1891년 1월 31일 봉기)를 촉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록 이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최후통첩으로 인해 고조된 반왕정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포르투갈 사회 저변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28]
이후 포르투갈 왕실의 과도한 비용 문제, 1908년 카를루스 국왕의 암살,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변화하는 사회 및 종교적 가치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군주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25]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이어졌고, 포르투갈은 오랜 군주제를 종식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25][28]
한편, 최후통첩으로 인해 악화되었던 영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1890년대 후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포르투갈이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영국에 차관 지원을 요청하고, 이후 발발한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포르투갈에 협조를 구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1899년 10월 14일 영국-포르투갈 선언을 발표하여 기존의 동맹 관계를 재확인했다. 이 선언에서 영국은 포르투갈 식민지를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향하는 무기 공급을 중단하고 보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28]
4. 2. 영국-포르투갈 관계 변화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의 요구를 쉽게 수용한 것처럼 보인 것은 포르투갈 내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적인 굴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포르투갈 군주정에 반대하던 공화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최후통첩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조제 루시아누 드 카스트루 총리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고, 안토니우 드 세르파 피멘텔이 이끄는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포르투갈 왕실의 재정 문제, 리스본 암살 사건, 사회·종교적 변화 등 다른 요인들과 결합하여 결국 포르투갈 왕정을 무너뜨린 1910년 10월 5일 혁명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5] 영국 정부가 외교적 고립을 감수하고 전쟁 가능성까지 내포한 강경책을 사용한 이유로는, 포르투갈이 마니찰란드와 시레이고원을 점령하여 영국의 아프리카 확장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26]최후통첩 이후 양국은 아프리카 식민지 경계 확정을 위한 협상에 나섰다. 1890년 8월 20일,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영토 경계선을 정의하는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포르투갈 내에서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조약 내용이 관보에 게재되자 새로운 시위가 발생했고 내각은 다시 붕괴했으며, 결국 포르투갈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세실 로즈 역시 이 조약에 반대했다. 이후 새로운 협상을 통해 포르투갈은 1890년 조약안보다 잠베지 계곡에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대신, 현재 짐바브웨의 마니칼랜드주를 영국의 영향권으로 양보하는 내용의 새 조약이 1891년 6월 11일 리스본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식민지 경계 확정 외에도 잠베지강과 시레이강에서의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하고, 영국이 잠베지강 어귀의 신드 항구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7]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은 한동안 영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 포르투갈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영국에 차관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후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역시 포르투갈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99년 10월 14일, 양국은 영국-포르투갈 선언을 발표하여 기존의 동맹 관계를 재확인했다. 이 선언에서 영국은 포르투갈 식민지를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로렌수 마르케스(현 마푸투)를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향하는 무기 공급을 중단하고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했다.[28]
비록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1890년 최후통첩 사건은 포르투갈 내부 정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포르투에서 일어난 공화주의자들의 봉기인 1891년 1월 31일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며, 이때 확산된 반왕정 감정은 1908년 2월 1일 카를루스 국왕이 암살당하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이어져 포르투갈 군주제가 종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3. 새로운 조약 체결
1890년 8월 20일,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영국과 포르투갈 정부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영토 한계를 정의하는 런던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8월 30일 포르투갈 관보 《디아리우 두 고베르누》에 게재되었고 같은 날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국내의 거센 시위와 포르투갈 내각 붕괴로 이어져 포르투갈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세실 로즈 역시 이 조약에 반대했다.[27]한편, 1890년과 1891년 사이에는 이미 마니칼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군과 로즈 휘하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있었다.[24]
결국 새로운 조약 협상이 진행되었고, 1891년 6월 11일 리스본에서 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이전 1890년 조약안보다 잠베지 계곡에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보상을 받았지만, 대신 현재 짐바브웨의 마니칼랜드주는 포르투갈의 영향권에서 영국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1890년 비준되지 않은 조약에서 포르투갈에 할당되었던 일부 지역이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로 재할당된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양측의 교전은 중단되었다.[24][27]
1891년 조약은 식민지 경계 확정 외에도 잠베지강과 시레이강에서의 항해 자유를 보장했으며, 영국이 잠베지강 어귀에 있는 신드 항구의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내용을 담았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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